핏빛 증표
BRACER
그대의 공헌에 감사하며
기요틴 아가씨는 스네즈나야성 중앙 광장에 앉아 현지인들처럼 야외에서 보르시와 술을 섞은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찬바람에 식었지만, 마시자 목구멍부터 배 속까지 뜨거운 기운이 번졌다. 그제야 기요틴 아가씨는 귀가 뾰족한 종업원이 불의 물을 두 배로 넣으라고 권한 이유를 이해했다. 그녀는 폰타인에서 스네즈나야까지 오느라 적지 않은 수고를 들였고, 대부분의 시간을 설원에서 보냈다. 날씨는 예상보다 추웠지만 길은 험하지 않았다. 그녀를 지체하게 한 것은 이곳의 기묘한 풍경이었다. 이를테면 높은 나무에서 눈더미로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었고, 얼음을 깨고 물에 빠지는 것으로 겨루는 아이들도 있었다. 가장 운이 나쁜 아이가 승자였기에, 물에 빠진 아이는 오히려 즐거워했다. 이 모든 광경은 알랭이 들려준 용사와 드래곤의 싸움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무척 신기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그녀는 찻잔을 들고 폰타인성의 벤치에 앉아 안개 너머 개축 공사를 바라보며 시공팀의 잘못을 하나씩 지적했다. 현장 감독은 화를 내기는커녕 감사를 표해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가 마음대로 말을 이어 가도록 두었다. 어느 협회의 지부장이라는 그 남자는 말투가 지나치게 잔잔해 듣고 있으면 잠이 왔다. 본래라면 쉬기 좋은 기회였지만, 알랭이 떠난 뒤 그녀에게는 멍하니 있거나 조는 시간이 이미 충분히 많았다. 연구 외의 잡무는 반쯤 잠든 채 처리하는 데에도 익숙했다. 지부장은 근처 은행의 자산 관리 상품을 추천했다. 그녀에게는 멜모니아궁이 알랭·기요틴 공작에게 지급한 거액의 보상금이 있었다. 모라를 그대로 묵혀 둘 생각은 없었다. 늙어 죽을 일도 없었고, 수백 년 뒤 지하실에 귀신 들린 인형이 산다는 괴담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국의 은행은 존재 자체가 수상했다. 지부장이 아무리 권해도 영리한 기요틴 아가씨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지부장은 블랙커피만큼 쓴 빵과 빵 맛이 나는 음료도 있다고 했다. 알랭은 그녀에게 인간과 같은 미각과 온도 감각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면 이 기능들이 저온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지 검증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붙임성 좋은 지부장 씨는 계속해서 이국의 모험담을 들려주었고, 중간중간 그녀를 칭찬하는 말도 끼워 넣었다. 그녀 같은 숙녀는 견문이 넓은 모험가들이 보기에도 드문 지식인이며, 여기서 건축 구조의 잘못이나 고쳐 주고 있기에는 재능이 아깝다고 했다. 그리하여 기요틴 아가씨는 빈 찻잔을 내려놓고, 빵 맛이 나는 음료를 직접 맛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눈과 얼음에 둘러싸인 어느 야외 테이블에서, 그녀는 우인단의 총괄관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옛뜰이 얼마나 오래된 뜰인지 생각하며, 풀로니아보다도 서투른 야수 요정이 술잔을 가득 실은 쟁반을 제대로 들려고 애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가운데, 가면을 쓴 남자는 세상을 구하려는 이상을 설명했다. 그는 이치에 맞지 않는 운명은 반드시 깨뜨려야 할 족쇄이며, 구세계를 파괴하는 일이 곧 세계를 구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운명과 구원은 익숙한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들렸다. 「하아, 알랭…」 그녀는 생각했다. 「내게 자유로운 영혼을 주면서, 내가 무엇을 할지는 생각해 본 적이 있었어?」 그러나 곧 생각을 바꿨다. 그것은 알랭이 아니라 자신이 풀어야 할 삶의 과제였다. 성검을 든 용자도, 과연 쓰러뜨리는 것이 옳은지조차 알 수 없는 악룡도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꼭두각시」 또는 「산드로네」라 불리기 시작했고, 그 이름에 걸맞은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한가한 때면 다시 익숙한 자리에 앉아 멀리 모험가 길드의 창구를 바라보았다. 캐서린이라는 안내원은 우아한 자세로 서 있었고, 마치 혹한의 눈보라에 영원히 시달리지 않을 존재처럼 보였다. 게시판에는 극장의 공연 안내문과 우인단의 모병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 있었고, 모병 포스터에는 여배우의 무대 의상보다도 선명한 붉은 꽃이 인쇄되어 있었다. 헌신한 자에게 약속된 훈장이었다. 스네즈나야에서 모험가 길드가 수행하는 역할을 알게 된 뒤로, 산드로네는 이런 광경을 더 이상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인단이 기르는 이상이라는 괴수에게 인재와 정보는 반드시 필요한 먹이였으니까. 이따금 몽롱해질 때면, 그녀는 자신 또한 그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