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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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렇게 바랜 문서. 지나치게 건조한 환경 탓인지 종이마저 바스러질 듯 약해져 있다. 그 위에는 차갑고 딱딱한, 감정의 흔들림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라리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순얼음 조형 기술을 지니고 있음에도. 의례과 교양 수업에서 나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심지어 역대 대공 가운데 가장 엄격했던 전임 대공마저 입을 모아 그녀를 칭찬했음에도. 그리고… 수많은 동족이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야말로 고귀하고 우아하며 사람들이 눈 여인에게 바라는 모든 모습을 갖추었다고 여기고 있음에도. 수많은 눈 요정 가운데 누구보다도 눈 요정다운 존재. 그토록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존재. 하지만 나는 라리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 눈 요정에게 사랑이란 헌신이며, 스스로 선택해 이루는 하나의 교환이다. 자신의 가슴을 열어 그 안의 모든 것을 꺼내 내어 주고, 사랑하는 이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내어 주기를 바라는 것. 하지만 라리사, 네가 갈고닦은 순얼음 조형 기술도, 우아한 몸가짐도, 다정한 말씨도… 그 모든 것은 오직 누군가에게 「바치기」 위해 존재하는 걸까? 매일을 살아가는 동안, 기술을 연마할 때도 꽃을 돌볼 때도, 그 수많은 순간 속에서 너는 어디에 있지? 너 자신은 어디에 있는 거야? 나는 예전에 라리사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하지만 라리사는 그 질문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복잡하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따. 「네 마음은 닫혀 있어. 파블리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걸까? 정말 그래야만 한다면, 나는 차라리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 내 의문을 듣고도 여전히 다정했던 그녀의 말과, 그 슬픈 눈빛에 괜히 화가 났다. 역시 나는 라리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 「모든 눈 요정을 이끄는 자는 온전한 영혼을 지녀야 한다」 이는 우리의 선조 모레브나가 남긴 가르침이다. 그리고 눈 요정이 온전한 영혼을 얻는 방법은 단 하나, 이른바 진정한 사랑을 찾는 것뿐이다. 라리사는 자신이 선택한 연인을 헤스페리데스로 데려왔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예전에는 본 적 없던 기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녀는 정말 기뻤던 걸까? 그때 그녀가 「연인을 선택」한 것은 대공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려야 했던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그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녀 곁에 있던 남자는 많은 동족에게 훤칠한 외모의 인간이라 칭찬받았고, 라리사의 짝으로도 제법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남자는 못생기고 무례했으며, 행동거지마저 천박해서 도무지 라리사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라리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괜히 답답하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아무래도 라리사는 사람 보는 눈이 별로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원래 취향이 형편없는 녀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라리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 그 남자, 눈보라가 빚어낸 칼날에 온몸의 살점이 모조리 베여 나가도 싸다! 어떻게 가장 중요한 의식에서 마음을 바꿀 수가 있지? 라리사는 그 의식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는데, 그걸 몰랐던 건가?! 어떻게 의식 도중에 도망칠 수가 있어? 겁쟁이, 더러운 인간, 쥐새끼, 도둑놈! 아무런 대답도 돌려받지 못한 라리사, 얄미운 라리사, 사람 보는 눈도 없는 라리사… 너도 자업자득이야! 하지만 라리사, 라리사… 너도 그렇게 화를 내고, 그렇게 슬퍼할 때가 있었구나? 구름마저 너를 위해 멈춰 섰고,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네 마음은 천둥마저 붙잡아 두었어… 그때의 네가 진쩌 너였다면, 왜 진작 이 말도 안 되는 규칙에 화를 내지 않았어? 왜 반드시 자신을 바쳐야만 하는 이 거짓된 「사랑」에 분노하지 않았어? 왜… 네게 의문을 던졌던 나에게는 화를 내지 않았어? 내가 눈보라를 뚫고 네게 달려갔을 때, 왜 네 몸은 그렇게까지 약해져 있었던 거야? 왜 네 얼굴을 가득 채우던 웃음과 기쁨도, 너의 모든 것도, 그토록 짧은 순간에 눈물처럼 차가운 바람 속에서 흩날리는 눈가루가 되어 버린 거야… 내 얼굴에 내려앉았을 때조차, 한 방울의 찬비보다 차갑지 않았는데 …… 그 후 나는 눈 요정들을 이끄는 대공이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모든 눈 요정을 이끄는 자라면 이른바 「온전한 영혼」을 지녀야 하는 것 아니었나? 내 의식을 집전한 이는 우리 일족에서 높은 명망을 지닌 오래된 눈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가끔은 이런 일도 있다고 말했다. 가끔은 이런 일도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진정한 사랑을 찾지 않아도 대공의 자리를 이을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라리사의 희생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우리 종족은 대체 언제까지 이 이상한 규칙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 거지… 반드시 찾아내겠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 거야. 이 터무니없는 「사랑」에 얽매인 동족들을 위해서. 그리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라리사를 위해서.
